탐라국입춘굿/제주전통문화

무속적 의례를 공유하는 신앙공동체, 당

제주민예총 2015. 1. 8. 17:57

무속적 의례를 공유하는 신앙공동체,

 

제주의 마을은 농경, 어로 등의 생업을 서로 돕는 생산 공동체이며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공동작업의 안전·번영을 기원하는 무속적 의례를 공유하는 신앙공동체였다.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은 민간신앙인 무속이 얼마나 생활 속에 뿌리내렸는가를 입증해 준다.

『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풍속조’를 보면, “제주 풍속에 대체로 산, 숲, 냇물, 연못, 언덕, 물가, 평지의 나무나 돌이 있는 곳에다 고루 신당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매년 설날부터 정월 보름까지 무격이 신독(神纛)을 받들고 나희(儺戱)를 행한다. 징과 북을 울리며 안내하여 동리로 들어오면 사람들이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놓아 굿을 한다” 고 조선조 성행하던 제주 무속신앙의 일면과 당의 소재지를 말해주고 있다.

무속의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식 제례법(祭禮法)이 남성들에게 보급되자, 여성들의 신앙으로 여성들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 제주의 전통 마을에선 남성중심의 유교식 ‘포제(酺祭)’와 여성중심의 무속적 ‘당굿’이 나란히 행해지고 있다. 무속적 당굿이 조선시대 ‘숭유정책’이나, 일본침략기 ‘민족문화말살정책’, ‘4·3사건’, 그리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미신타파’ 구호 아래서도 멸실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굿이 마을 주민들의 결속력을 다져주고 생활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사자료에 의하면 제주의 당은 자연마을별로 적게는 1개, 많게는 5개까지 있는데 2003년 현재 346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제주에서 가장 일반적인 당의 형태는 고목(古木)이나 궤, 커다란 바위 등을 신체로 삼아 성소(聖所)화 한 경우다. 당집을 지어 그 안에 제단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신목을 신체화한 경우는 와흘리 본향당, 와산리 도망물당, 북촌이 당팟당, 광령리 본향당, 상명리 느지리케인틈당 등이고, 상귀리 상귀황다리궤당과 보목리 조노깃당, 김녕궤눼기당은 절벽 틈인 ‘궤’와 동굴 안에 제단을 마련한 경우이다.

중문동 불목당과 와산리 불돗당은 커다란 돌덩이인 ‘궷돌’을 신앙화 한 경우이고, 상ㆍ하가리 새당하르방당은 선돌 형태의 다섯 개의 바위를 신앙시하는 경우로, 그 중 가장 큰 바위를 새당하르방이라 불린다. 당집 형태로는 행원리 큰당과 남당, 종달리 본향당, 고내리 큰당, 서귀포 본향당 등이 있다.

이처럼 제주의 당은 신목을 신체로 삼거나 당집을 지어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 돌 자체를 신앙시하기도 했다. 자연적인 궤(동굴)나 바위 등을 신성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김녕리 서문하르방당, 화북동 윤동지 영감당, 회천리 오불여래처럼 돌미륵을 모신 경우도 있다.

어쨌든 당은 오랜 세월 제주지역 기층민들의 신앙장소로, 마을과 개인의 안녕을 보살펴 주는 곳이다. 마을을 수호하는 본향당 등에서는 심방을 모셔다 굿을 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드나들며 비념하기도 했다. 제주사람들에게 당은 굿을 통해 신 또는 조상들과 신인동락(神人同樂)하며 삶의 토대를 강화하고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생활공간으로, 제주민들은 돌과 나무처럼 자연의 대상물을 신격화해 의지 처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문무병(1993), 「제주도 당신앙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제주도(1993), 『제주도지』.
제주도(1998), 『제주의 민속』(Ⅴ).
조성윤ㆍ하순애ㆍ이상철 공저(2003), 『제주지역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 백산서당